2026. 10. 28 - 11. 14
10 AM - 6 PM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45길 11
무료관람
SUMMKER
이슬 맺힌 나뭇잎이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유화 물감을 천천히 쌓아 올려 그려낸 숲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한 조각을 조용히 불러내는 공간이다.
최현희의 고요한 풍경은 현실의 특정한 장소가 아닌 과거의 감각과 정서로 쌓아올린 겹쳐진 내면의 풍경이다.
감상자는 따뜻한 햇살 아래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걸었던 날들, 가장 순수하고 안전했던 유년의 한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풍경 속에 놓인 피아노와 촛대, 꽃, 우체통은 시간의 흔적을 품은 기억의 매개물이다.
그것들은 마치 토템처럼 자신과 닿았던 이들의 목소리와 표정, 사라진 계절의 공기를 소환한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사랑받았던 순간,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고 따뜻했던 기억이 사물의 표면 위에 겹쳐진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기억의 풍경 속에서 감상자는 잊고 있던 삶의 온기를 다시 마주한다.
최현희는 전경의 풀잎을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원경의 숲과 하늘을 부드러운 붓질로 멀어지게 한다.
이 대조는 화면 너머로 끝없이 확장되는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자연 속에 놓인 정물은 현실의 사물인 듯 보이지만 대기원근법으로 흐려지는 풍경 안에서 점차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렇게 작품 속 숲은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잠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득하고 평화로운 피안의 공간이 된다.
이 비현실적인 평온은 최현희 특유의 따뜻한 빛의 표현으로 더욱 선명해진다.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과 어스름한 새벽의 색은 단절되지 않고 섬세하게 이어지며 빛의 산란 효과는 화면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숲과 소복이 내려앉은 지칭개의 홀씨는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배가한다.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한 이 공간에서 감상자는 번민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즐거웠던 기억에 둘러싸인 채 소란한 마음을 잠재운다.
촛불이 다 타고 꺼지면 잠시 멈춘 시간은 다시 흘러가고 일상은 재개된다.
그러나 최현희는 회화 안에 그 찰나의 위안을 고정한다.
최현희의 회화는 흘러가다 결국 사라질 기억을 현재에 붙잡으려는 시도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생산되고 소멸하는 시대에 작가는 풀밭과 숲의 풍경을 느린 붓질로 반복하여 쌓아 올린다.
그 고요한 축적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고 우리가 지나쳐 온 내면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홀씨가 눈처럼 숲을 감싸듯 최현희의 회화는 감상자를 마음 깊이 간직해 온 따뜻한 빛으로 포근히 감싼다.